
'쇼팽 콩쿠르 우승자' 에릭 루, 꿈을 이룬 자의 서정시
[리뷰]'쇼팽 콩쿠르 1위' 에릭 루, 우승 후 첫 국내 무대
KBS교향악단과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협연
81세 거장 슬래트킨 지휘
신디 맥티 작곡 '순환' 초연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905년'
오랫동안 상상해 온 꿈을 이룬 뒤 무대에 서는 연주자의 심정은 어떨까. 지난 10월 3주간 국내 클래식 팬들의 밤잠을 설치게 한 주인공. 제19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우승자 에릭 루가 우승자 자격으로 첫 내한 무대에 섰다. 이미 프로 연주자로 몇차례 내한 공연이 있었지만, 이번은 그가 간절히 원하던 쇼팽 콩쿠르 우승자로 첫 내한이라 의미가 각별했다.
지난 2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KBS교향악단과 협연한 쇼팽 콩쿠르 우승자 에릭 루에게 초미의 관심이 쏠렸다. 우승자 발표 직후, 협연이 예고된 KBS교향악단 정기연주회 티켓은 순식간에 매진됐다. 마치 세계 3대 오케스트라의 공연 티켓을 잡듯 '취케팅'의 열기가 이어졌다. 폴란드 바르샤바 현지에서 실연으로 듣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려는 관객들이 루의 연주를 직접 듣고자 공연장으로 향했다.
27세의 중국계 미국인 에릭 루는 재수 끝에 쇼팽 콩쿠르 우승을 차지했다. 이날 루는 콩쿠르 결선에서 자신을 우승으로 이끈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협연했다. 대부분의 결선 참가자들이 보다 화려한 1번을 선택하는 관행과 달리, 루는 드물게 2번을 선택했고 결국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 곡으로 우승한 역대 두 번째 우승자로, 그의 스승인 당 타이손이 2번으로 우승한 전례를 제자가 잇게 됐다.
이날 무대는 81세 지휘자 레너드 슬래트킨이 이끌었다. 디트로이트 교향악단과 리옹 국립 오케스트라의 명예 음악감독 등을 맡고 있는 그는 그래미상을 여섯 차례나 수상한 거장. 젊은 피아니스트와 노장 지휘자의 만남 자체로도 화제였다.
187cm의 큰 키와 마른 체형, 그리고 관객을 향한 90도 폴더 인사까지. 루의 첫인상은 차분하면서도 겸손한 태도가 돋보였다.
1악장에서 오케스트라가 역동적인 선율을 펼친 뒤 피아노에 서서히 이야기를 건넸고, 루는 서정적인 선율을 섬세하게 끌어냈다. 초반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몇 차례 미스터치도 있었지만, 곧 작품 흐름에 완전히 몰입하며 안정감을 되찾았다. 2악장은 루의 내공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리스트는 이 악장을 두고 “거의 이상적인 완벽함이며, 그 표현은 빛으로 빛난다”고 평했다. 현악기의 트레몰로는 피아노의 선율을 더욱 빛나게 했고, 루는 온화하면서도 선명한 타건으로 쇼팽의 서정성을 아름답게 구현했다. 때때로 마치 꿈을 꾸듯 허공을 바라보며 음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모습도 재현됐다. 콩쿠르 무대에서 ‘무결점 테크닉’보다 음악 자체에 깊이 몰입하는 예술가의 태도로 승부를 건 그의 모습 그대로였다. 3악장에서는 유려한 테크닉과 폴란드 전통 춤곡 마주르카 리듬을 살린 연주가 돋보였다. 전반적으로 루의 음색은 실크처럼 부드러웠고, 그러면서도 과하지 않고 담백했다.
앙코르는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리아였다. 쇼팽 협주곡 뒤에 숨겨진 루의 내밀한 음악 세계를 조용히 드러내는 선곡이었다. 완벽한 무대는 아니었음에도 이날 관객들은 유난히 따스했다. 이제 막 꿈의 첫발을 내딛은 음악가에게 보내는 응원의 공기가 공연장을 채웠다. 루는 22~26일 울산, 통영, 서울 등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이날 객석에는 박재홍, 신창용 등 동료 피아니스트들과 이번 쇼팽 콩쿠르 5위에 오른 말레이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빈센트 옹도 자리했다. 특히 신창용과 루는 커티스 음악원과 뉴잉글랜드음악원(NEC)으로 이어진 각별한 인연이다.
이날 KBS교향악단은 루와의 협연 외에도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1부 협연 직전 신디 맥티의 ‘순환(Circuits)’을 국내 초연했다. 타악기의 반복 리듬과 바이올린의 고음 대비가 인상적이었다. 이 곡은 지휘자 슬래트킨의 아내이자 현대음악 작곡가인 맥티가 남편에게 헌정한 곡으로, 연주 후 직접 무대에 올라 관객에게 인사를 전했다.
2부에서는 악단을 대표하는 레퍼토리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 ‘1905년’을 연주했다. 러시아 제정 시기 ‘피의 일요일’ 사건을 음악으로 펼쳐낸 작품으로, 2년 전 KBS교향악단 팀파니스트 이원석의 팀파니를 찢은 명연으로 화제가 된 곡이다. 무대 위에 드리워진 폭력과 절규의 서사가 강렬하게 전달되었고, 슬래트킨과 악단은 관객의 열띤 환호에 거듭 화답했다.
조민선 기자 sw75j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