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이야기

[리뷰] 파지올리 고집한 에릭 루, 거장 슬래트킨의 ‘피의 일요일’… KBS교향악단 제820회 정기연주회

  • 2025-11-30
FILE :




파지올리 고집한 에릭 루, 거장 슬래트킨의 ‘피의 일요일’… KBS교향악단 제820회 정기연주회


에릭 루의 연주기대 반감 상쇄시킨 KBS교향악단의 쇼스타코비치!

 

KBS교향악단의 820회 정기연주회에 쇼팽콩쿠르 우승자로서의 무대를 장식한 에릭 루는 자신의 2025년 제19회 폴란드 쇼팽 콩쿠르 우승자 순회공연을 기념키위한 이날의 공연에서 바르샤바의 열기와 분위기를 서울에서도 그대로 전달코자 하는 생각에서 스타인웨이 피아노 대신 파지올리를 선택했다. (사진 KBS교향악단 페이스북) 

 

2025년 11월 21일 금요일 저녁 8시,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KBS교향악단 제820회 정기연주회는 여러모로 클래식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무대였다.

 

2025년 제19회 폴란드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에릭 루(Eric Lu)의 협연, 그리고 세계적 명성을 지닌 미국계 지휘자 레너드 슬래트킨(Leonard Slatkin)의 국내 데뷔가 한 무대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KBS교향악단의 제820회 징기연주회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미국계 지휘자 레너드 슬래트킨의 국내 데뷔무대로서 KBS교향악단으로서도 최근 높아진 존재감을 다시 부각시킬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11번의 연주가 다시금 클로즈업되는 무대였다. 

 

■ “바르샤바의 열기, 서울에도” ? 파지올리 선택의 이유

 

에릭 루는 폴란드 바르샤바 결선 무대에서 선택했던 파지올리(Fazioli) 피아노를 이번 서울 공연에서도 그대로 사용했다.

 

그는 바르샤바 현지의 긴장감과 열기, 그리고 그 고유의 음색 이미지를 서울 청중에게도 고스란히 전달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파지올리는 스타인웨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섬세하며 조용한 음색을 지녀, 감정의 미세한 결을 표현해야 하는 쇼팽 협주곡과 탁월한 조화를 이룬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날 공연 직후 일부 관객들 사이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다소 뻑뻑하게 들린다”는 아쉬움 섞인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파지올리 피아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에릭 루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이어진 강행군과 해외 투어 일정으로 인한 피로 누적이 연주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에릭 루가 향후 앞으로 40-50년간 자신의 피아노 일생을 성공캐리어로 이끌기 위해서는 이번 서울무대에서처럼 외부여건에 흔들리지 않을 그의 캐리어의 중심을 잡는 것에 보다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사진은 거의 반세기 나이 터울의 레너드 슬래트킨과 피아니스트 에릭 루가 공연을 마치고 손을 잡으면서 관객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 에릭 루, “외부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필요할 때

 

에릭 루는 지난 2018 리즈 콩쿠르 당시에는 스타인웨이(Steinway)를 사용했었다. 스타인웨이가 밝고 단단한 음색, 풍부한 바디감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면, 파지올리는 섬세하고 따뜻한 질감이 돋보이는 악기다. 쇼팽 협주곡 결선에서 그가 파지올리를 선택한 것은 음악적으로 충분히 납득할 만한,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다만 이번 서울 공연에서는 그가 가진 특유의 섬세함을 100% 발휘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연주자의 피로 누적은 터치와 호흡, 해석의 깊이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건반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은 인상적이었으나, 바르샤바 결선 영상에서 보여주었던 그 압도적인 개성이 이날 무대에서 온전히 살아났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향후 40~50년 이상 이어질 그의 긴 음악 인생을 고려할 때, 지금은 피로도나 환경 등 외부 변수에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자기 중심’을 다져야 할 시기로 보인다.

 

특히 이번 공연 며칠 뒤, 서울시향 무대에 오른 76세의 거장 이매뉴얼 액스(Emmanuel Ax)가 베토벤 협주곡 3번을 통해 보여준 ‘중용(中庸)의 미학’은 좋은 본보기가 된다. 흥분하거나 몰아치지 않으면서도 결코 모자람이 없는 노장의 균형감은 젊은 비르투오소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또한, 22일 함신익과 심포니 송 공연에서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Stephen Hough)가 보여준 그리그 협주곡과 자작곡 초연 역시 내적 안정성을 갖춘 연주로서 에릭 루에게 훌륭한 참고서가 될 만했다.

 

 

 

백스테이지에서 함께한? 쇼팽피아노콩쿠르 우승자 에릭 루와 미국계 노장 지휘자. 슬래트킨.? 

 

■ KBS교향악단, 슬래트킨의 지휘로 쇼스타코비치 11번을 다시 보다

 

이날 공연의 또 다른 주인공은 단연 KBS교향악단과 지휘자 레너드 슬래트킨이었다.

 

디트로이트 교향악단, 리옹 국립오케스트라 등 세계 유수의 악단을 이끌어온 거장 슬래트킨의 한국 첫 무대라는 점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그가 KBS교향악단과 함께 선보인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11번 ‘1905년’은 이날의 하이라이트였다.

 

쇼스타코비치의 첫 ‘표제 교향곡’인 이 작품은 전 악장이 쉼 없이 이어지며, 악장마다 러시아 혁명가(革命歌)의 선율이 등장해 서사를 이끈다. 음악학자들이 ‘음악적 프레스코화’라 부를 정도로 장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난곡이다.

 

슬래트킨은 특유의 디테일한 지휘로 KBS교향악단 단원들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각 악장에 서린 ‘피의 일요일’ 당시의 긴박함과 비극적 정서를 음표 하나, 프레이즈 하나까지 꼼꼼히 조율하며 밀도 높은 완성도를 만들어냈다.

 

KBS교향악단은 최근 관현악 대작 레퍼토리에 집중하며 그 존재감을 꾸준히 증명해내고 있다. 지난 7월, 마르쿠스 슈텐츠와 함께한 쇤베르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Op.5>가 해외 유수 악단들의 내한 러시 속에서 ‘맞불’을 놓으며 호평받았던 것처럼, 이번 쇼스타코비치 11번 역시 KBS교향악단의 저력을 다시금 확인시켜준 수작(秀作)이었다.

 

 

 

글, 음악칼럼니스트 여 홍일, 편집 주 진노

출처: https://www.mhn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325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