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伊 라 스칼라' 이끄는 정명훈 "아시아인 최초 감독이요? 나라 빛낼 기회라 좋았죠"
마에스트로 정명훈 기자간담회
라 스칼라 차기 음악감독 선임
리카르도 샤이 후임…2027년 취임
'247년 역사' 최초 아시아인 감독
“전 일평생 외국 생활을 했잖아요. 그래서 라 스칼라 극장 최초의 아시아인 음악감독이란 타이틀 자체가 제게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그런 생각은 있었죠. 이건 분명 한 지휘자로서 나라를 빛낼 좋은 기회고, 그렇다면 꼭 해야 한다고요.”
이탈리아 오페라 최고의 명가인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차기 음악 감독으로 선임된 지휘자 정명훈(72)은 19일 부산 연지동 부산콘서트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라 스칼라 극장은 지난 12일(현지시간) 정명훈이 리카르도 샤이의 후임으로 2027년부터 음악 감독직을 수행한다고 밝혔다. 아시아인 지휘자가 음악 감독에 선임된 건 라 스칼라 극장 247년 역사상 처음이다.
정명훈은 “라 스칼라 극장과는 36년간 사랑했던 사이인데, 갑자기 결혼하게 된 느낌”이라며 “이젠 친구가 아닌 가족이 되는 만큼 큰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1989년도 이 극장에 데뷔했을 때부터 알 수 있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제 음악을 잘 이해해주는 곳이란 걸요.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잘하는 악단을 정말 많이 만났지만, 이만큼 잘 통하는 악단을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러 유명 오케스트라들이 음악감독직을 제안해도 둘러대며 거절할 수 있었지만, 라 스칼라 극장 한 군데만큼은 도저히 ‘노(NO)!’를 외칠 수가 없었어요(웃음).”
1778년 개관한 라 스칼라 극장은 베르디, 벨리니, 로시니, 푸치니 등 전설적 작곡가의 걸작 오페라들이 대거 초연된 명문 극장이다. 벨리니의 ‘노르마’, 베르디의 ‘나부코’와 ‘오텔로’, 푸치니의 ‘나비 부인’과 ‘투란도트’ 등이 이 극장에서 처음 공개됐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클라우디오 아바도, 리카르도 무티, 다니엘 바렌보임 등 세계적인 지휘자들이 음악 감독을 지낸 극장으로도 유명하다. 음악 감독은 극장의 공연 레퍼토리 선정부터 단원 선발까지 음악적 부분을 총괄한다.
정명훈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오페라 작곡가가 베르디”라며 “라 스칼라에서도 베르디의 작품들을 꽤 많이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내년 12월 7일 라 스칼라 극장 시즌 오프닝 무대에 서게 되는데,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덧붙였다. “30여 년 전에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와 같은 작품을 녹음까지 했었는데, 이젠 그때보다 잘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하는 게 공부입니다. 아내가 ‘한평생 하고 또 공부하느냐’란 말을 하는데, 조금씩 더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유럽 클래식 음악계에선 지휘자 다니엘레 가티 등 이탈리아 지휘자가 차기 음악감독으로 호명될 것으로 전망했지만, 올 2월 취임한 포르투나토 오르톰비나(65) 총감독이 정명훈의 음악감독 선임안을 공식 제안하고, 이를 이사회가 만장일치로 승인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이탈리아인이 아닌 지휘자가 이 극장의 음악감독에 선임된 건 다니엘 바렌보임에 이은 역대 두 번째다. 정명훈은 “현지 정치가 중 이탈리아 지휘자가 차기 음악감독을 맡길 원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며 “그것보단 극장의 오케스트라 단원과 합창단원은 물론 현장 스태프 인력까지 저를 많이 원했다는 사실을 듣고 기뻤다”고 했다.
정명훈은 1989년 라 스칼라 극장에 데뷔한 이후 오페라 9편을 84차례 지휘하고, 141회의 음악회를 이끌 만큼 각별한 인연을 맺어왔다. 이는 음악감독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출연 횟수다. 라 스칼라 극장이 정명훈을 두고 “밀라노 관객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예술가 중 한 명”이라며 “음악감독을 제외하면 라 스칼라 극장이 세계적 명성을 얻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지휘자”라고 평한 이유다. 2023년엔 이 극장의 오케스트라인 라 스칼라 필하모닉의 첫 명예 지휘자로 추대되기도 했다. 라 스칼라 필하모닉이 명예 지휘자로 위촉한 건 정명훈이 유일하다.
1989년 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그는 “타이밍이라는 건 사람이 조절할 수 없는 것”이라며 “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을 이끌었던 젊은 날과는 다르겠지만, 지금의 모습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라 스칼라를 도울 수 있을 만큼 돕겠다”고 말했다. “36년 전에는 프랑스어도 잘 못 했고 프랑스 오페라도 지휘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경험이 부족했지만, 젊었기에 극장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하루 24시간 내내 쏟아낼 에너지가 있었죠. 밤늦게 공연이 끝나고 다음 날 연습이 잡혀 있으면 극장 방에서 잠을 잘 정도였으니까요. 이젠 그때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지만 함께 좋은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2027년부터 라 스칼라 극장 음악 감독과 부산콘서트홀·오페라하우스(2027년 개관) 예술감독을 겸하는 그는 “부산오페라극장의 개관 공연만큼은 라 스칼라 극장과 함께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며 “라 스칼라 극장 감독으로서의 활동이 부산콘서트홀·오페라하우스의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제가 하는 일은 눈에 안 보이는 일입니다.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 좋은 씨를 심어놓은 일이죠. 오랜 기간 지속해야 하고, 아주 힘든 과정이겠지만, 발전의 방향을 잘 잡아주는 게 지휘자의 가장 큰 책임이잖아요. 이탈리아 오페라에 관해선 부산이 아시아를 대표하는 곳이 되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정명훈은 한국 사회에 대한 애정 어린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조금은 (서로에게) 덜 날카로워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음악과 노래를 굉장히 사랑하는 민족이잖아요. 사실 함께 노래를 부르다 보면 싸우기 힘들어지거든요. 세계 어디서든 ‘한국은 싸우기를 좋아하는 나라가 아니라 노래를 사랑하는 나라’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너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김수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