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탄압이 쇼스타코비치를 위대한 예술가로 만들었다?
정치와 예술 사이에서 평생 줄타기… 올해 서거 50주년 맞아 공연 이어져
지난 1979년 6월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의 내한을 앞두고 논란이 일었다. 레퍼토리에 소련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교향곡 5번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에서 공산권 작곡가의 작품은 연주가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주최 측은 프로그램 변경을 요청했다. 하지만 번스타인은 이를 무시하고 예정대로 연주했다. 쇼스타코비치의 곡이 국내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연주되는 순간이었다.
금기가 한 번 깨지자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은 이듬해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지휘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에서 다시 연주됐다. 또한, 1982년 쇼스타코비치의 아들 막심 쇼스타코비치가 지휘하고 손자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협연한 서울시향의 프로그램에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과 피아노 협주곡 2번이 포함됐다. 물론 로스트로포비치와 쇼스타코비치의 아들 및 손자는 소련에서 서방으로 망명했기 때문에 연주가 반공 선전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지난 1979년 뉴욕 필하모닉의 내한공연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이 처음 연주된다는 기사.
이런 연주들 덕분에 쇼스타코비치는 공산권 예술가 해금 조치가 이뤄지는 1988년보다 먼저 한국 관객과 만나게 됐다. 어쩌면 이것은 쇼스타코비치가 소비에트 체제에 순응한 작곡가이자 핍박받은 작곡가라는 양면성을 가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스탈린이 싫어한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올해 서거 50주년을 맞은 쇼스타코비치는 구소련의 대표 작곡가로 교향곡 15개, 관악 4중주 15개 등 총 147개의 작품을 남겼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 연주와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쇼스타코비치는 불과 13세의 나이에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세인 1925년 졸업 작품으로 쓴 교향곡 1번은 그를 소련 클래식계의 기대주로 만들었다. 이후 그는 러시아 혁명과 레닌을 찬양하는 교향곡 2·3번과 니콜라이 고골의 동명 소설을 토대로 한 오페라 ‘코’를 잇따라 발표했다. 그의 음악은 꽤 전위적인 편이었는데, 1920년대 소련 음악계의 관용적 분위기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1928년 권력투쟁에서 완전히 승리한 데 이어 1934년 제1차 소비에트 작가회의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창작의 토대로 채택되면서 소련 예술계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리고 쇼스타코비치가 1934년 발표한 두 번째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그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나약한 남편, 탐욕스러운 시아버지, 기회주의자 애인 사이에서 살인과 불륜 등 기구한 삶을 살아간 여주인공을 그렸다. 초연 당시 소련을 넘어 유럽에서도 호평받았지만, 1936년 1월 스탈린이 관람한 이후 평가가 180도 달라졌다. 스탈린은 화를 내며 1막이 끝난 뒤 자리를 떴고, 며칠 후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는 이 작품에 대해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고 비판했다. 급기야 당국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 ‘형식주의’라는 낙인을 찍었다. 소련에서 예술가들을 비판할 때 자주 사용한 형식주의는 내용보다 형식이 중시된다는 의미로, 대중이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하며 서구 스타일을 따랐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쇼스타코비치의 생각을 담은 볼코프의 ‘증언’
언제 숙청될지 모르는 신세가 된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4번의 초연을 포기했다. 구성이 파격적이라 또다시 형식주의라는 비판을 들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대신 쇼스타코비치는 러시아 혁명 20주기인 1937년 ‘당국의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답변’이란 부제를 단 교향곡 5번을 발표했다.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암시하는 팡파르로 끝나는 이 작품은 쇼스타코비치를 위기에서 구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쇼스타코비치는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틀 안에서 작품을 썼다. 하지만 1945년 소련이 2차대전에서 승리한 후 발표한 교향곡 9번 때문에 또다시 비난받는 신세가 됐다. 그는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직을 내놓고 당국의 명령에 따라 선전 영화의 음악을 작곡하는 신세가 됐다. 다행히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문화적 해빙 분위기 속에서 그는 작곡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심지어 소련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서방에 연주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서방에서도 환영받던 쇼스타코비치가 1960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를 소련의 어용 작곡가로 보게 됐다. 그런데, 1976년 미국으로 망명한 소련 음악학자 솔로몬 볼코프가 쇼스타코비치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쓴 회고록 형식의 ‘증언-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록’이 1979년 출간되면서 쇼스타코비치의 이미지는 체제의 탄압 아래 괴로워한 예술가로 바뀌었다. ‘증언’의 신빙성에 문제 제기도 있었지만, 소련 붕괴 이후 쇼스타코비치의 지인들은 그 내용이 대체로 진실이라고 인정했다. 실제로 쇼스타코비치는 체제와 관련 없는 음악을 몰래 작곡했다가 스탈린 사후 발표하기도 했다.
탄생 100주년이던 2006년 국내에서 관심 급증
현재 쇼스타코비치는 20세기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그의 작품들은 널리 사랑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들어 꾸준히 연주되다가 탄생 100주년이었던 2006년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쇼스타코비치의 파란만장한 삶이 음악과 함께 사람들을 매료시켰기 때문이다. 쇼스타코비치 관련 서적들이 잇따라 번역되면서 새로운 애호가들이 유입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쇼스타코비치는 예술가로서 포기할 수 없었던 자의식과 숙청당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현실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가 온몸으로 살아낸 시대의 긴장은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남았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1997년 다큐멘터리 ‘스탈린에 저항한 쇼스타코비치’에서 스탈린의 지속적인 탄압이 쇼스타코비치를 더욱 위대한 작곡가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단순한 표현이지만 쇼스타코비치를 가장 잘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올해 서거 50주년을 맞아 한국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을 들을 기회가 많다. KBS교향악단은 지난 24일 엘리아후 인발 지휘, 첼리스트 한재민 협연으로 첼로 협주곡 1번을 선보여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이어 11월 레너드 슬래트킨 지휘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 ‘1905년’을 연주한다. 그리고 서울시향은 3월과 5월 실내악 시리즈로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3중주 제2번과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선보인다. 독일 첼리스트 알반 게르하르트와 바이올리니스트 알레나 바에바가 각각 서울시향 단원들과 함께한다.
또 부산시향이 6월 첼로 협주곡 1번과 교향곡 10번을 준비했고, 국립심포니는 12월 교향곡 11번 ‘1905’을 선보인다. 금호아트홀 상주음악가에 선정된 실내악단 아레테 콰르텟은 9월 현악 4중주 1번을 연주한다. 이외에 오는 4월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와 8월 롯데콘서트홀의 ‘클래식 레볼루션’에서는 쇼스타코비치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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